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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가슴 속에 살아있는 영웅들의 이야기 [광기와 우연의 역사]

" 마지막 순간까지, 손가락이 얼어붙어 만년필이 그의 굳은 손에서 굴러 떨어질 때까지 스콧 대장은 계속해서 일기를 써내려 갔다. " 

<광기와 우연의 역사 : 남극에 남긴 두 번째 발자국> 중에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역사의 어느 결정적인 순간을 잡아내는 데에 천재적인 소질을 갖춘 작가입니다. 또한 역사 속에서 잊혀진 어떤 인물을 생생히 견져 내어, 인간이 가져야 할 고귀한 가치를 이끌어 내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 <광기와 우연의 역사> 속에서도 열 두편의 역사와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낸 영웅들의 기쁨과 슬픔과 좌절과 성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가장 탁월한 점은 사실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마치 현장을 살아낸 듯, 인물 속으로 몰입하여 생생히 기술하는 데에 있습니다.


로버트 F. 스콧은 영국 해국 지휘관 출신의 근엄하고 성실하고, 단단한 내면의 에너지로 흔들림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스콧은 20세기 초에도 인류에게 열리지 않은 오직 한 곳, 남극을 정복하기 위한 위험하고 담대한 원정대를 이끌게 됩니다. 몇 달에 걸쳐, 남극 대륙의 해변에 도착한 스콧의 원정대는 베이스 캠프를 치고, 남극 정복의 기회를 노립니다. 하지만, 그에겐 다른 경쟁자가 있었으니, 그는 노르웨이 사람 아문센이었습니다. 남극점에서 더 가까운 곳에 베이스 캠프를 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스콧은 초조해 합니다. 역사에는 최초의 이름만이 기억될 뿐, 두 번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조국인 영국에 위대한 소식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한시라도 빨리 남극을 향해 출발하고자 했습니다.


드디어 1911년 11월 1일, 서른 명의 원정대는 남극점을 향한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생명체라곤 전혀 없고, 여름이라는 날씨조차도 영하 40도라는 상상할 수 없는 황량함을 향한 끝 모를 발걸음을 내디딘 겁니다. 처음엔 30명이 시작했지만, 중간 보급소들을 만들어 가면서 스무 명, 그 다음에는 열 명 그리고 마지막은 다섯 명만이 최후의 진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성공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죠. 마지막 남은 다섯 명은 미지의 땅을 향해 고독하게 나아 갑니다. 지극히 단조로운 움직임. 그저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 것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최초로 남극을 정복하리라는 희망만이 유일하게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150킬로, 94킬로, 70킬로... 이렇게 목적지에 다가가면서.. 그들은 마지막 인내력으로 버티어 내고 있었습니다. 처절한 인내와 고통을 겪고 기어코 남극에 도착한 그들. 그러나 그들은 이 곳에 이미 다녀간 인간의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보다 한 달 정도 앞서 노르웨이의 아문센 일행이 남극점에 도달하여, 자신들의 기념을 남겨 놓았던 겁니다. 

"1월18일, 스콧 대장과 네 명의 대원들이 남극에 도달했다. 첫 번째라는 도취감으로 눈이 멀지 않았기에 스콧은 멍한 눈길로 슬픈 풍경을 바라 보았다. - 여기에 볼 것이라곤 없다. 지난 며칠간의 몸서리나는 단조로움과 다른 그 무엇도 여기엔 없다.- " 303


하지만, 이들의 귀향길은 더더욱 위험했습니다. 자신들이 걸어온 흔적을 따라가면서, 만들어 놓은 중간 배급소들을 찾아 내지 못하면 이 냉혹한 남극의 대륙에서 살아서 돌아가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극도의 피로함과 실망감, 그리고 계속되는 최악의 날씨 속에서 그들의 강철 같은 의지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대원 중 한 사람이었던 에반스가 끔찍한 고통으로 미쳐 버리면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공포와 불안감으로 지친 그들이 중간 보급소를 찾아내긴 했지만, 보급품 중 기름이 너무 적었습니다. 이 살인적인 추위에 맞서 땔감을 절약해야만 한다는 절박함은 그들에게 더욱 큰 실망감을 주었습니다. 

오우츠 대원은 자신이 상태가 동료들에게 짐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지치고 약해져, 점점 사글어져 가는 희망을 희미하게나마 붙잡기가 점점 어려워 졌습니다. 3월 21일 그들은 천막을 떠날 엄두가 나지 않았고, 다음 보급소까지 불과 20킬로 떨어진 곳이었지만 한 발자욱도 더는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식량과 땔감은 떨어졌고, 영하 40도가 넘는 강추위 속에서 세 사람은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상합니다. 그 누구도 그들을 도와줄 수 없음을 잘 알았고, 죽음이 바로 코 앞까지 온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스콧은 편지를 써내려 가기 시작합니다. 훗날 자기 시체 곁에서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겪었던 슬픔과 고통, 그리고 최후의 용기를 적어 내려간 이 편지가 발견되리라는 믿음과 함께.. 그리고 그들 셋은 작은 천막 안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에 베이스 캠프에서 초조하게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던 대원들에 의해서 세 명의 주검이 발견됩니다. 스콧의 시체는 윌슨을 마치 형제처럼 안은 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들을 눈 언덕 위에 묻고, 검은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 다섯 명의 주검 옆에서 발견된 필름들, 사진들, 편지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 영웅들의 놀라운 여정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졌습니다. 영국의 국왕은 그들의 향해 무릎을 꿇었고, 세상은 이 다섯 명의 죽음을 인간 의지의 영웅적 사례로 영원히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 위대한 모순이지만, 영웅적인 죽음으로부터 삶이 솟아 나오고, 몰락으로부터 무한한 상승 의지가 솟아 나오는 법이다. (중략) 그러한 몰락이야말로 시인이 여러 번 그리고 삶이 수없이 형상화해낸 모든 비극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비극인 것이다. " 313

그와 같은 비극은 살아 있는 우리 세대를 통해 기어코 다시 살아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남극을 발견한 영웅으로 아문센만 기억합니다. 하지만, 인류의 진정한 진보는 스콧과 같은 인물을 통해서 비약하게 됩니다. 

슈테판 츠바이트는 잊혀진 영웅들을 살려내며,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여한 찰나의 운명들을 기술함으로써, 인류에게 그리고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에게 거대한 각성의 경험을 선사합니다. 그래서 그 영웅들이 가슴 속에 살아 있고, 평범한 삶의 순간에서도 거대한 발자욱을 기억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됩니다. 그의 책을 읽는 것은 축복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의 글을 통해, 나폴레옹과 괴테, 도스토예프시키와 톨스토이를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새로운 경험이 되리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