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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농담처럼 자신과 세상을 용서하는 법 [날돈의 북리뷰 #7]




"하지만 나는 시간이 가져다주는 모든 화해의 기회에 맞서 맹렬하게 저항하였다."

- <농담>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의 두 번째 책 <농담>을 읽었습니다.

 

루드빅은 학교에서 장도유망한 공산당의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예쁜 여학생에게 보낸 치기 어린 편지 하나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죠. 당에 충성스런 그 예쁜 여학생은 그의 편지를 공개했고, 그의 친구로 자처했던 파벨 제마넥 때문에 루드빅은 학교를 나와 탄광으로 좇겨가게 되었어요. 자신의 무죄와 충성을 보여주려 했지만, 세상은 그를 인정해 주지 않으려 했죠. 인생의 쓰디쓴 실패 속에서 루드빅은 루치에를 만나 목숨같은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외로운 두 영혼은 서로 다른 곳을 어루만지고 있었어요. 한 순간의 욕망이 실수가 되었고, 두 사람은 영원히 헤어집니다. 그리고, 가여운 두 영혼은 인생을 믿지 않게 됩니다.

 

이 가여운 인물들과 얽혀 있는 사람들 또한 허망하고 외롭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파벨 제마넥의 아내인 헬레나는 루드빅의 복수로 갈기갈기 상처로 찢겨지게 되고, 루드빅의 친구인 코스트카는 우연히도 루드빅의 첫사랑인 루치에를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그 사랑을 지켜낼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죠. 루드빅의 또 한명의 친구인 야로슬라브는 이미 바래어진 과거의 전통을 되살리려 애쓰다가, 존재의 허망함에 심신이 망가져 버립니다.

 

루드빅은  상처 받고 버림받은 자신의 과거를 기필코 돌이켜 놓겠다는, 복수하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맞서 나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치열하게 살면 살수록 자신의 과거는 더욱 더 스스로를 조여요. 치기 어린 젊은 시절, 그 시절이 더없이 슬퍼져요.

"나는 슬픔에 사로 잡혔던 것이었다."p93

 

루드빅의 복수는 헬레나를 이용하면서 절정에 다다릅니다. 헬레나는 제마넥의 아내였어요.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된 루드빅은 제마넥을 복수하기 위해 헬레나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고 나서, 제마넥의 아내를 마음껏 농락해 놓고 나서, 그리곤 처참하게 배반해 버리는 겁니다.

각인처럼, 도장처럼, 숫자처럼, 상징처럼 그렇게 새겨지게 만든 그 경련을 계속 되풀이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비밀스런 숫자를 훔치는 것! 그 옥새를! 파벨 제마넥의 비밀의 방을 약탈한다! 구석구석까지 모두 뒤져내고 난장판을 만들어 놓는다! p260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요? 헬레나가 무슨 잘못인가요? 그녀는 그저 우연히도 제마넥의 아내였을 뿐이었고, 그와의 지겨운 결혼 생활에 진절머리가 나 있을 뿐이었어요. 그리고, 그저 순수하게 루드빅을 사랑하려 했죠. 그런 그녀에게 루드빅이 한 짓을 보세요. 그녀의 상처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어요. 그녀는 그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의 배신에 복수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자살 기도 앞에서 '농담'같은 상황이 벌어져요. 그녀가 죽기 위해 먹었던, 어린 남자 동료의 진통제가 사실은 변비약이었던 거예요. 그녀의 유언장을 받고, 미친 듯이 달려온 루드빅의 앞에 그녀는 화장실에서 위경련을 일으키며 고통스러워 했지만, 그것은 죽음의 고통은 아니었고, 그냥 위경련이었을 뿐이었어요. 삶의 무거움 속에서 이런 가벼운 농담이 생명을 살리게 되는 아이러니. 루드빅은 이 우연의 상황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요.

 

제마넥의 복수를 위해 찾은 자신의 고향. 이곳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정말 우연히도 그의 첫사랑이었던 루치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해요. 세월의 흔적은 그토록 짙었지만, 대체 그녀와의 이 우연한 만남이 그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친구인 코스트카를 통해 루치에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 옛날,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육체적 접촉을 기어코 거부했던 그 배반의 이유가, 사실은 루치에 그녀가 이미 어린 시절, 윤간의 아픔으로 받은 상처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 거죠. 그래서 그의 서투른 시도가 그녀에겐 돌이킬 수 없는 또 다른 상처가 되고 말았던 겁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됩니다.

나는 마침내 왜 그녀가 이발소에서 내게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운명이 나의 운명과 닮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자 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 둘은 서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를 비껴갈 수 밖에 없었겠지만, 우리의 삶은 둘 다 모두 유린의 역사라는 점에서,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나 결혼한 부부와 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결백한 가치들이었다.... 잘못은 다른 데 있었다... 루치에와 나, 우리는 유린된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이 세계를 불쌍히 여길 수 없었던 까닭으로 우리는 거기에 등을 돌렸고... 다같이 악화시키고 말았다.... 루치에, 네가 여러 해가 지난 뒤 나에게 와서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인가?유리된 세계에 대한 연민을 청원하러 온 것인가? p426

 

루드빅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대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사소한 농담 같은 편지 하나가 망쳐 놓은 이 인생이라는 것이 사실은 또 별 것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마지막 장면은 이렇습니다. '민속 공연'이 벌어지는 작은 시골 도시에서 루드빅은 제마넥을 만납니다. 루드빅은 헬레나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서 그에게 상처를 주려 했지만, 이미 그에겐 훨씬 더 아름다운 젊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헬레나와 자신의 관계에 격려를 해주고, 응원을 해주었어요. 농담같은 이런 상황에서 루드빅은 이 복수의 가치가 한없이 가벼워지는 허무함을 느꼈어요.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어요. 그렇게 내려 놓지 못하고 삶을 무겁게 만들 필요가 없었어요. 그의 아픈 과거는 유감스런 일이었어요. 루드빅은 불행했어요. 어쩔 수 없어요. 그의 첫사랑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상처였어요. 그 상황에서 그에겐 다른 방도가 없었어요. 운명이이예요.

 

시름에 지친 루드빅은 친구인 야로슬라브의 길거리 공연에 자기도 참여하게 해달라고 해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허름한 음식점에서의 작은 공연. 그곳에서 루드빅은 인생의 위로가 무엇인지 발견하려고 하지요. 인생이 자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에 귀기울여 듣고자 합니다. 그러다 갑작스런 발작으로 야로슬라브가 쓰러지고, 쓰러진 그를 안으며 루드빅은 기어코 알게 됩니다. 자신의 복수와 인생은 이제 끝이 났다. 운명이 끝이 났으니, 이제 나는 자유롭다 라는 것을요.

증오의 대상 제마넥을 쓰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 귀향이 결국은 이렇게 땅에 쓰러진 내 친구를 두 팔에 안고 있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전율하였다. p432

우리의 인생도 결국 하나의 <농담> 같은 거라면,

오늘 우리가 그리 힘들어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래서

조금은 가볍게, 인생을 이해하며, 용서하며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