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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식] - 알랭 드 보통 /

이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자극은 무엇인가?

 


1872년 모네가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림의 기본기가 무시되었음은 물론이고, 붓터치도 형편없는 그림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그림이 르아브르 항구와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에 이 그림은 불편했다. 

'현실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실제 현실과는 일치하지 않는데, ... 우리가 이 시계에 관한 클리셰적인 묘사로 둘러싸여 있는 까닭에, 모네의 [인상 / 일출]에 대한 우리의 첫 반응은 르아브르 항구는 전혀 저렇게 생기지 않았다는 훼방과 불평일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 그의 그림은 새로이 평가를 받았다. 

'간과하고 넘어갔던 시각적 현실의 한 차원을 포착하는 데에는 그야말로 탁월했다고 간주했다.'

이 그림이 인상파의 시작을 알리는 바로 그 [인상/일출]이다.



알랭 드 보통[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식]은 독자에게 두 가지 메세지를 전달한다. 하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의 글과 사람을 소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를 통해서 우리 삶에 적용가능한 기능적 본질적 태도를 조언해 주는 것이다. 때로는 프루스트의 목소리를 통해서 때로는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의 입을 통해서 이 두 가지 작업이 교모히 전달된다. 100만 하고도 20만자에 이르는 음침한 소설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특유의 유머와 지식과 색다른 시선을 이용하여 우울하고 병약한 프루스트의 삶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결국 이 기발하고 명민한 이 책이 전달하고자하는 바는 이것이다. 다르게 바라보라.


소설을 읽는다고 치자. 그 책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가?

'어떤 소설의 가치란, 우리 묘사 능력보다도 훨씬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능력,... 즉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인식하기는 하지만, 차마 우리 자신의 힘으로 공식화하지 못했던 인식을 지목하는 능력에까지 뻗어나가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관찰력은 그의 구호로부터 시작한다.

"너무 빠르지는 않게요" 

이렇게 함으로써 빨리 지나쳐 버렸을 때 알 수 없었던 뭔가 흥미로운 새로운 것을 발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느림의 미덕은 삶을 풍성하게 한다는 점에서 권장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프루스트는 고통과 우울함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 느꼈다. 병약한 신체와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은 그를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게 했다. 하지만, 이런 삶을 통해 그는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

'프루스트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고통을 겪고 나서야, 무엇이 자신을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것을 진정으로 배우게 된다.'

고통이 진리로 이끌어 준다고 판단한 그는, 책이나 선생으로부터 배우는 지혜는 고통이 없는 것이라, 그 진정성이 부족하고, 오직 고통스러운 자신의 경험 만이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 주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는다. 고통을 고통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더 유리한 방향으로 밀어나가는 감각과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루스트는 진부함을 증오했다. 클리셰(Cliché)가 가득한 허위의 세상은 가치가 없다.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허무하다. 말하는 방식은 삶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그의 표현과 글과 행동은 그의 허상의 삶을 충분히 대변한다. 

'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 우리가 느끼는 방식과 궁극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애초에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느냐를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클리셰적인 세상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이, 느끼지 못했던 삶의 소소한 행복들이 비로서 눈에 들어 온다. 아름다움과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발견되어야 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책을 내려 놓으라고 말한다. 
책은 앞 서 얘기했던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는 열쇄가 되어 준다. 그 징검다리와 시작으로서의 독서의 역할을 유용하다. 하지만, 독서가 스스로를 뒤덮어서 책이 삶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면, 그것은 오히려 유해하다. 

'이것이 바로 독서의 가치이며, 또한 독서의 부적절성이기도 하다. 독서를 훈련으로 만든다는 것은 자극에 불과한 것에 너무 큰 역할을 부여하는 일이다. 독서는 정신생활의 문턱에 놓여 있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행활에 소개시켜 준다. 그러나 독서 자체가 정신생활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정신활동이란 남의 인생을 사는 것과 다름 아니다. 내것이 아닌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저자들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삶을 모르기 때문이며, 오로지 자신만이 그 삶에 무한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렬한 책이고, 도끼같은 각성을 준다.
김훈, 리처드 도킨스, 니코스 카찬차키스, 조지 오웰, 그리고 알랭 드 보통.
나는 그들과 달라야 한다. 
그들이 내가 아닌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