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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흑산] - 김훈 : 이 땅에 설 곳 없는 가련난 자들이 저곳 다른 삶을 갈망하며 쓰러져 가다.


'
토굴에서.. 황사영은 뒤쳑였다... 여기서부터 저 아득히 먼 세상까지, 그 세상을 지나서 또 그 너머 세상까지 걸어갈 수가 있을까. 다시 그 너머의 세상을 이끌고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가 있을까.. 그래서 그리움이나 기다림이나 목마름이 없는 세상에 당도할 수 있을까..' 

[
흑산] 중에서


늘 김훈의 글은 힘이 듭니다. 끝길 알 수 없는 먹먹함에 가슴이 답답합니다.
특히나 [흑산]의 아픔은 너무 쓰라립니다.
손으로 꾹꾹 눌르며 아리게 써 내려간 150년 전 인간의 고통이 너무도 처연합니다.
이 땅에 기대 설 곳 없는 가련한 자들이 하늘의 다른 삶을 갈구하며 바람처럼 쓰러져 갑니다.
멍한 슬픔이 저미어 옵니다.

숱하게 강변북로를 지나쳐 오면서도, 단 한번도 절두산의 비극에 대해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사는데, 그들은 오래 전에 죽었고, 지금은 평화로울 뿐입니다. 하지만, 김훈은 그곳을 지나칠 때마나 그 작은 언덕이 심하게 스스로를 압박하였습니다.



' 자유로를 따라서 서울을 드나들 때마다, 이 한줌의 흙더미는 나의 일상을 심하게 압박하였다. 이 소설은 그 억압과 부자유의 소산이다... 흑산에 유배되어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다가 죽은 유자의 삶과 꿈, 희망과 좌절을 생각했다. 그 바다의 넓이와 거리가 내 생각을 가로 막았고, 나는 그 격절의 벽에 내 말들을 쏘아댔다.'
[흑산] 중에서

불과 140여년 전입니다.
아주 가까운 과거입니다. 그 멀지 않은 시간 전에, 이 땅에서 살아낸다는 것이 이토록 처절한 일이었을 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굶주림, 억압, 폭력, 부조리.. 이러한 더러운 것들이 세상에 가득차고 이것들을 결코 이겨내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을 때, 그들에게 '야소(예수)'가 옵니다. 닿지 않는 저 먼 곳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디딜 곳 없는 그들에게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희망'이 옵니다. 그러나 그 '희망'에 대한 댓가는 너무도 처참합니다.

' 뼈는 돋아나지 않았다. 뼈는 붙지 않았고 움트지 않았다. 부러진 뼈는 너덜거리다가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피고름이 흘러서 감옥 바닥의 멍석을 적셨다. 피고름에 구더기가 슬었고, 빈대가 꼬였다. 구더기가 파리가 되어서 상처의 진물을 빨았다.'
[흑산] 중에서

고통에 못이겨 배교한 사람들이나 끝까지 지켜낸 사람들이나 모두 같은 영혼입니다. 삶과 죽음은 멀지 않지만, 그 간격은 너무 많은 것들로 아득합니다. 하나 결국 모두가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되리라 믿습니다. 배교하지 않고 형장에서 죽은 정약종이나, 배교하고 폭로하여 세상으로 돌아간 적약용이나, 적절히 배교하여 흑산으로 유배되어 물고기를 바라보다 쓸쓸히 죽어간 정약전이나 모두 같은 인간이며, 서로의 살아냄을 묵묵히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종교가 주는 희망에 대해 고민합니다.
절망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그 힘을 느끼게 됩니다.
처절한 현실 속에서 구원의 빛을 그릴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을 알겠습니다.
먹먹합니다.

김훈은 소박합니다.
그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소박한 목표는 짧고 단단한 문장들로 가슴에 비수가 되어 박히는 힘이 됩니다.
쓸쓸하여 답답하고 슬프고 아련하지만,
다시 김훈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흑산
국내도서>소설
저자 : 김훈
출판 : 학고재 201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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