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 엔돌핀 <수요레터>

🤖 AI의 국경을 실감하다

잇츠맨 2026. 6. 17. 23:40

 

 

안녕하세요, 촌장입니다.

 

  • 지난주 금요일, 6월 13일 저녁, 공개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앤트로픽의 최신 AI 모델이 미국 정부의 지시로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미국 외 국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미국 안에 있더라도 미국 시민이 아니면 엔트로픽의 최신 AI 모델을 쓸 수 없다는 명령입니다. 심지어 앤트로픽에서 일하는 외국 국적 직원들까지 자기 회사 모델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였는데요. 
  •  평소 우리가 늘 사용하던 그 도구가 어느 날 문득 국경이라는 걸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 우리는 당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미국 외 국가들은 자체적인 AI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불이 붙었는데요. 오늘 수요레터에서는 이 사건을 입구로 삼아, AI 모델이 국가의 전략 자산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미국 정부의 통제 지시

  • 앤트로픽이 미국 정부로부터 지시를 받은 건 6월 13일 오후 5시 21분이었다고 합니다. 상무부가 보낸 수출 통제 지시였는데요. 최신 모델인 페이블 5(Fable 5)와 미토스 5(Mythos 5)를 미국 시민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차단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 이 모델들은 클라우드로 제공됩니다. 같은 창구로 미국인과 외국인이 모두 접속하다 보니, 외국인만 골라서 막는 게 기술적으로 간단치 않았습니다. 결국 앤트로픽은 모든 고객에 대해 두 모델을 통째로 내렸습니다. 외국인을 겨냥한 조치가 사실상 전 세계 사용 중단으로 이어진 셈입니다.
  • 미국 정부가 든 명분은 국가 안보였습니다. 누군가 이 모델의 안전장치를 우회하는, 이른바 '탈옥' 방법을 찾았다는 신고가 들어왔다는 겁니다. 앤트로픽의 주장은 문제가 된 건 아주 좁고 보편적이지 않은 우회 방법일 뿐이고, GPT-5.5 같은 다른 공개 모델로도 똑같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합니다. 사이버보안을 다루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정도라는 거였죠. 다만 법적 지시인 만큼 일단은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칩 통제에서 모델의 통제로

  • 그동안 미국이 통제하려 했던 대상은 주로 반도체였습니다. 미국은 엔비디아의 고성능 칩이 중국으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오랫동안 빗장을 걸어왔죠. 칩은 손에 잡히는 물건이라 국경에서 막을 수 있고 관리도 가능했죠. 
  • 하지만 이번에는 칩이 아니라, 칩 위에서 돌아가는 AI 모델 그 자체가 통제 대상이 됐습니다. 이게 왜 중요한 분기점일까요.
  • 우리는 모델을 산 게 아니라 잠깐 빌려 쓰고 있을 뿐이고, 빌린 것은 언제든 회수될 수 있다는 자각을 일깨운 거죠. AI 모델이 전기나 석유처럼 국가가 관리하는 전략 자산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한 나라의 결정 하나로, 전 세계 수많은 일터에서 쓰이던 모델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시대가 올 수도 있습니다. 개별적인 기업 뿐 아니라 국가 단위의 AI 전략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 도래한 것 같습니다. 

 

 

 미국을 믿을 수 있나

  • 이 사건은 미국을 제외한 여러 국가들에게 또렷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남의 모델에 올라타 있으면, 그 줄이 언제 끊길지는 내가 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 영국은 자국 AI 산업에 더 깊이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영국은 이미 5억 파운드 규모의 소버린 AI 펀드를 만들고, AI를 빌려 쓰는 나라가 아니라 만드는 나라가 되겠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 중국은 칩 수출이 막히자 방향을 틀어, 딥시크나 큐원 같은 모델을 오픈소스로 풀며 비서구권으로 영향력을 넓히는 전략을 이미 채택해 왔구요. 유럽연합은 규제라는 카드와, 반도체 장비를 사실상 독점한 ASML이라는 길목을 지렛대로 삼고 AI 생태계의 주요 플레이어로서의 입지를 다지려 하고 있습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일찌감치 모든 국가에 저마다의 소버린 AI가 필요하다고 말해오고 있죠.
  • 반면 AI 주권을 정의하는 일이 벽에 젤리를 못 박으려는 것과 비슷하다고 표현현 전문가도 있습니다. 완전한 AI 자립이라는 게 말처럼 깔끔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AI 생태계는 수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연히 모델이 구동되는 인프라와 H/W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 위의 AI 모델들, 이러한 AI 플랫폼들이 운영될 수 있는 개별적인 전문 도메인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이 AI 생태계이죠. 그러니 아무리 독자적인 AI를 한다고 해도 절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 한국도 지금 그 한복판을 지나고 있죠. 정부는 'AI 3강 도약'을 내걸고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요. 해외 거대 모델에 대한 기술적, 경제적, 안보적 종속에서 벗어나, 국방이나 의료, 행정처럼 민감한 영역에서는 우리 모델을 쓰자는 취지입니다. 핵심 조건이 흥미롭습니다. 데이터 수집부터 모델 설계와 학습까지 전 과정을 처음부터 직접 해야 하는 '프롬 스크래치' 방식이어야 하고, 해외 모델을 손본 파생형은 독자 모델로 쳐주지 않습니다. 지난해 8월 다섯 팀으로 출발해, 올해 1월 1차 평가에서 LG AI연구원, SK텔레콤, 업스테이지가 살아남고 네이버클라우드와 NC AI가 떨어졌습니다. 연말이면 두 팀만 남깁니다. 모델을 국가의 자산으로 보겠다는 흐름이, 우리 안에서도 이미 실제 사업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입니다.

 

 

 격차라는 그림자

  • AI 격차는 세 가지 층위에서 벌어집니다. 하나는 기업 사이에, 다른 하나는 국가 사이입니다. 당연히 개인도 이런 격차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겠죠.
  • 최신 모델 하나를 훈련하는 데 수억 달러가 든다고 합니다. 사실 이 정도 자원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은 소수의 거대 기업뿐입니다.
  •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를 다 합쳐도 전 세계 AI 연산 능력의 3%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국가 사이의 격차는 그래서 더 무겁습니다. 유엔개발계획은 'The Next Great Divergence', 우리말로 옮기면 '거대한 분기'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AI가 국가 간 발전 격차가 AI 때문에 다시 벌릴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오랫동안 조금씩 좁혀지던 나라 사이의 격차가 거꾸로 다시 벌어지고 있다는 건데. 자신들의 고유 모델이 없는 나라는 선두적인 AI 모델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을 두고, 일각에서는 '디지털 식민지'라는 다소 무거운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 소버린을 표방하며 지은 데이터센터조차 상당수가 미국의 클라우드 사업자, 그러니까 AWS나 애저, 구글 위에서 돌아간다는 조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주권은 정말 가능한가 하는 역설이 여기서 고개를 듭니다. 한국 역시 학습 데이터의 대부분이 영어권에 쏠려 있고, 범용 성능에서 선두 모델을 따라잡는 일이 여전히 만만치 않습니다. 담을 높이 쌓으려 해도, 그 담의 벽돌 상당수가 결국 남의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빌릴 것인가

  • 그러니 칩 설계와 제조 장비, 데이터, 인재, 전력에 이르는 긴 사슬을 한 나라가 전부 손에 쥐는 일은 어느 나라에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미국마저도 그러하죠. 그러니 완벽한 AI 주권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진짜 물음은 모든 걸 자립하느냐가 아니라, 어느 길목만큼은 내가 직접 쥐고 나머지는 어디서 효과적으로 빌려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에 있습니다. 전부 가지려는 욕심보다, 끊겨서는 안 될 곳을 정확히 아는 분별이 더 현실적인 전략일지도 모릅니다.
  • 이번 사건이 새삼 일깨워 준 건,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AI 들이 사실은 저 멀리 미국에서 빌린 것이고 언제든 회수될 수 있다는 진실이었습니다.
  • 모델에도 국경이 생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빌릴 것인가. 이 질문은 국가 단위에서만 의미있는 건 아닙니다. 자기 일의 도구를 외부에 통째로 맡겨 둔 기업에게도, 그리고 우리 각자 개인에게도 똑같이 돌아오는 물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촌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