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촌장입니다.
- 요즘 업무에서 AI를 활용하는 분들이 정말 많이 늘었습니다. 보고서 초안을 잡고, 이메일을 다듬고, 자료를 정리하고, 코드를 짜는 일이 예전보다 한결 빨라졌죠. 사실 저도 요즘 AI 덕을 많이 봅니다. 막히던 문제를 빠르게 풀어보고, 평소라면 엄두도 못 냈을 시도들도 해보고, 한 번에 처리하는 일의 양도 분명 늘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들죠.
나, 꽤 생산적이 됐는데?
- 그런데 묘하게도 한가해지기는커녕 더 바쁘고 정신이 없습니다. 일은 분명 빨라졌는데, 퇴근 시간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 늦어진 것 같단 말이죠.
분명 시간을 아꼈는데, 그 아낀 시간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콜센터와 컨설팅 현장의 연구는 AI가 우리를 더 빠르고 유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확실한 근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삶에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는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세탁기의 역설'이라는 연구가 있는데요. 미국의 역사학자 루스 코완이라는 사람이 세탁기와 청소기가 등장했던 1960년대 미국 주부들의 가사 노동시간을 확인해 보았더니, 줄기는 커녕 오히려 더 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내용입니다. 어쩐지 뭔가 지금의 AI 사용과 유사해 보이지 않나요?
- 그런데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를 외주하는 데서 오는 근본적인 주제 말이죠.
- 오늘 수요레터에서 AI를 사용하는데서 오는 여러 이야기들 함께 나눠볼까 합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빨라진 건 분명하다
- AI가 일의 능률을 높여준다는 건 기분 탓이 아니라 꽤 단단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 한 연구진이 콜센터 상담원 5천여 명을 분석했더니, AI 도우미를 쓴 뒤 시간당 처리하는 상담 건수가 평균 14% 늘었습니다. 특히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직원일수록 효과가 컸는데, 서툴던 사람을 능숙한 사람 수준으로 빠르게 끌어올린 셈이죠. 다른 실험에서는 컨설턴트들에게 AI를 쥐여줬더니, AI가 잘 다루는 종류의 작업에서 결과물의 질이 40%가량 좋아졌습니다.
- 숫자만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AI는 우리를 더 빠르고 유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아낀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개인의 능률이 올라간 만큼 우리 삶에도 여유가 생겼느냐 하면,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 얼마 전 한국은행이 취업자 5천여 명을 조사했더니, AI를 쓰는 사람의 업무시간이 주당 1.5시간쯤 줄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낀 시간이 더 많은 성과로 이어졌는지 따져보니, 시간 절감과 처리량 사이의 상관관계가 0으로 나왔습니다. 시간은 분명 아꼈는데, 그게 생산으로는 연결되지 않은 거죠.
- 아낀 시간이 어디로 새는지에 대한 단서를 최근 스탠퍼드 연구진이 내놨습니다. 이들은 '워크슬롭'이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AI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막상 알맹이는 없는 결과물을 만들어 동료에게 넘기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겉이 멀쩡해서, 받는 사람은 한참 들여다본 뒤에야 빈 곳을 발견하고 그걸 메우느라 한 건당 평균 두 시간을 더 씁니다. 직장인 열 명 중 넷이 최근 한 달 새 이런 결과물을 받아봤다고 하죠.
- 내가 아낀 시간이 누군가의 시간을 잡아먹고, 그 일이 다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 함께 조금씩 더 바빠집니다.
세탁기의 역설
- 1865년 경제학자 윌리엄 제번스는 석탄을 더 효율적으로 쓰는 기술이 나오자 석탄 소비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걸 발견했습니다. 효율이 좋아져 값이 싸지면 사람들은 그만큼 더 많이 쓰게 된다는 거죠. 도구가 일을 덜어주면, 우리는 그 도구로 더 많은 일을 벌이게 됩니다.
- 미국 역사학자 루스 코완의 연구는 이 역설을 생활 속으로 가져옵니다. 코완은 세탁기와 청소기 같은 가전이 집안일을 한결 수월하게 만들었는데도, 정작 가사노동 시간은 줄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빨래가 쉬워지자 사람들은 옷을 더 자주 빨기 시작했고, 깨끗함의 기준 자체가 높아졌으니까요. 도구가 편해진 만큼 그 도구에 거는 기대도 함께 올라간 겁니다. AI로 보고서를 빨리 쓸 수 있게 되니 더 많은 보고서를 더 자주 요구받는 지금과 꼭 닮았죠.
- 경제학자 케인스는 1930년에 한 가지 예언을 남겼습니다.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면 100년 뒤 인류는 주당 15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여가에 쓰게 될 거라고요. 그 100년이 거의 다 됐는데, 우리는 그가 그린 그림과는 정반대 자리에 서 있습니다. 버는 건 그의 예측만큼 늘었지만, 일하는 시간은 좀처럼 줄지 않았습니다.
풍요로워질수록 더 바빠진다는 이 역설은, 기술이 바뀌어도 끈질기게 되풀이됩니다.
생각을 맡긴다는 것
- 여기까지는 시간과 일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더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가는 게 시간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이죠.
- 올해 MIT 미디어랩이 한 연구를 내놨습니다. 사람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같은 주제로 글을 쓰게 하고 뇌파를 쟀는데, 도구 없이 머리로만 쓴 그룹이 가장 활발하고 폭넓은 뇌 활동을 보인 반면 AI를 쓴 그룹은 뇌의 연결이 가장 약했습니다. 게다가 AI를 쓴 사람들은 방금 자기가 쓴 글조차 제대로 인용하지 못했고, 그 글이 '내 것'이라는 느낌도 가장 옅었다고 합니다. 연구진은 이를 '인지 부채'라고 불렀습니다.
AI가 당장의 수고는 덜어주지만, 그 대가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 빚처럼 쌓인다는 뜻입니다.
- 1983년 리잔 베인브리지라는 연구자가 '자동화의 역설'이라는 개념을 내놨습니다. 자동화는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것인데, 역설적으로 사람의 역할을 더 어렵고 중요하게 만든다는 통찰입니다. 설명은 이렇습니다. 어떤 일에 능숙해지려면 그 일을 자주 반복해 봐야 하는데,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을 죄다 기계에 넘기고 사람에게는 예외적인 상황만 남겨두면, 사람은 정작 판단력을 단련할 일상의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다 기계가 멈추는 순간 그제야 사람이 나서야 하는데, 그때 꼭 필요한 바로 그 능력은 이미 녹슬어 있죠. 한때 전문가였던 사람이 어느새 초보자가 되어 그 자리에 서 있게 되는 겁니다.
- 단순한 일은 AI에 맡기고 사람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라는 말은 무척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해낼 감각이라는 게, 실은 사소하고 기본적인 일들을 손수 더듬어 보는 과정에서 길러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습니다. 기본기를 건너뛰고 통찰만 쏙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통찰은 대개 그 지루한 기본기 위에서야 피어나니까요.
무엇을 외주 줄 것인가
- 우리는 오랫동안 참 많은 것을 바깥에 맡기며 살아왔습니다. 힘쓰는 일은 기계에, 계산은 컴퓨터에, 길 찾는 일은 내비게이션에 넘겼죠. 대체로 그 외주는 우리 삶을 편하게 해줬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일만큼은 조금 사정이 다른 것 같습니다. 생각이란 남에게 맡기는 순간, 맡긴 사람 안에서 그 능력이 함께 옅어지는 묘한 성질을 가졌으니까요. 일도 성과도 따지고 보면 눈에 잘 띄지 않는 사소한 과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완성되는 것일 텐데, 그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면 결과물은 빨리 손에 쥐어도 정작 그걸 '내 것'이라 부를 감각은 흐려지겠죠.
- AI가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준다는 말은 아무래도 절반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진짜 질문은 조금 다른 곳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벌어둔 시간을, 또 그만큼 덜어낸 수고를,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채우기로 선택하고 있을까요.
촌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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