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 엔돌핀 <수요레터>

그녀는 왜 날 떠났을까?

잇츠맨 2025. 5. 2. 00:56

안녕하세요, 촌장입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SF 앤솔로지 시리즈 『블랙 미러(Black Mirror)』는 기술이 인간 사회와 감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오며 꾸준한 찬사를 받아왔습니다. 매 시즌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은 과연 행복해졌는가”라는 핵심적인 가치와 의미를 묻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한데요. 특유의 서늘함과 깊이 있는 통찰로 전 세계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블랙 미러(Black Mirror)』 가 최근 시즌7 를 선보였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 미러>가 최근 시즌7을 선보였다.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관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출처 : 넷플릭스>

          

 

 

짧지만 강렬한 여섯 편의 에피소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술과 인간 심리를 탐구하며, 완성도 면에서도 다소 아쉬웠던 시즌6의 넘어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에피소드5, 『율로지(Eulogy)』는 기술을 통해 ‘기억’과 ‘감정’을 진하게 건드리는 아주 뛰어난 작품입니다. 『율로지(Eulogy)』에서 주인공 ‘필립’ 역을 맡은 '폴 지아마티'는 담담하면서도 섬세한 연기로 상실과 화해, 따뜻한 이해의 과정을 진정성 있게 그려냅니다. 이 배우 어디서 봤나 싶었는데, 작년에 개봉했던 『바튼 아카데미』 에서 고집불통 고등학교 선생 ‘폴’로 나왔었더군요. 거기서도 꽤나 인상깊은 연기를 보였었는데, 이번 『율로지(Eulogy)』 에서 그의 감정 연기는 너무 뛰어 납니다.

 

<블랙 미러> 시즌7의 다섯번째  에피소드 『율로지(Eulogy)』 폴 지아마티의 연기가 끝내준다. <출처 : 넷플릭스>

        

 

 

 

주인공 ‘필립’은 오랜 세월 잊으려 했던 연인 ‘캘리’의 부고 소식을 듣습니다. 한때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랑이었지만 그러나 깊은 오해와 이별로 끝나버린 옛 연인의 죽음 앞에 잠시 감정적으로 흔들립니다. 오랜 세월 기억의 저편에서 잊고 있었던 그녀가 죽음 이후에야 자신을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부고의 소식을 전한 ’율로지(Eulogy)’라는 기업은 지인들의 추억들로 고인의 명복을 기념하도록 하는 장례 서비스 회사입니다. 애써 묻어둔 기억을 꺼내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때로 사랑을 다시 잃는 것만큼 아플 수 있기에 ‘필립’은 잠시 망설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과거로 돌아가는 여정에 발을 들이게 되면서 왜곡되고 잊혀진 기억의 비밀에 서서히 다가가게 되는 이야기가 『율로지(Eulogy)』 의 스토리입니다.

 

필립은 잊혔던 캘리의 기억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빛바랜 사진 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을 마주한다. <출처 : 넷플릭스>

         

 

 

 

관자놀이에 부착하는 작은 원형 기기를 통해 고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손에 쥔 몇 장의 흐릿한 사진과 단편적인 기억에 의지하면서 대화와 사진의 이미지의 단서들을 토대로 3D 기억 공간을 창조해 냅니다. 사진 속 장소가 입체적으로 재구성되고, 잊었던 대화와 감정이 서서히 그곳을 채워 갑니다. 화려한 영상 효과는 아니지만, 빛바랜 사진 속의 공간에 들어가서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이 대단히 현실적이고 흥미롭습니다. 기억의 과정을 탐험하는 여정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그려 냅니다. 

 

관자놀이에 부착하는 기억 재생 장치. AI가 임베드되어 있어서 대화를 통해 잊혀진 기억들을 함께 찾아 나선다.  <출처 : 넷플릭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추가로 상황을 설명하고 맥락을 보충할수록 공간이 점점 더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변해간다는 점입니다. 처음엔 뿌옇던 배경이, 하나의 단어, 하나의 감정으로 조금씩 선명해지고,옷의 색깔, 공간의 공기, 심지어 음악 소리까지 살아납니다.

기억의 가장 깊은 곳으로 이끄는 건 음악이었습니다. 말로 다 복원할 수 없었던 장면을 함께 듣고 연주했던 한 곡의 선율로 선명히 기억을 살려냅니다. 그 순간, 필립은 오랜 오해를 넘어, 진짜 캘리의 마음과 마주하게 되는 감동적인 장면을 만들어 냅니다.

 

화려한 효과는 아니지만, 사진 속 장소를 3D 공간으로 창조해 내는 과정이 흥미롭다. 정말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찾            아가는 여정처럼 느껴진다. <출처 : 넷플릭스>

          

 

 

 

『율로지』를 보며 저는 문득,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생성형 AI의 또다른 가능성을 떠올렸습니다. 사진 한 장, 대화 몇 마디, 흐릿한 감정의 흔적만으로도 과거를 복원하고, 때로는 왜곡되었던 기억까지 새롭게 재구성하는 시대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거죠.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합니다. 자신의 오해로 왜곡되기 일쑤이고, 기억이 스스로를 속이기도 합니다. 기억의 편린들은 오해를 더욱 고착화시켜, 자신과 타인의 진짜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런 기억들을 꼼꼼하게 채워 넣은 과정이야말로 온전히 자신의 모습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율로지(Eulogy)』 는 단순히 기록을 저장하는 기술이 아니라, 오해를 풀고, 관계를 이해하며,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기술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두려움도 따릅니다. 기억을 복원하는 기술이 얼마나 나의 진짜 과거를 돌려줄 수 있을까요? 기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기억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될까요? 어쩌면 이마저도 오해의 과정을 더 심화시키게 만드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건 아닐까 염려됩니다. 무엇보다 진실을 마주한다는 건 참으로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잊혔던 상처를 곪아 터지게 하여 현재를 살아 버티는 힘을 무너뜨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때론 잊혀짐을 통해 현재를 살아내는 힘을 얻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기억을 찾아가는 것이 과연 항상 옳은 것일까? 어쩌면 잊혀짐이야 말로 인생의 미덕은 아닐까? <출처 : 넷플릭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로지』는 조용히 묻습니다.

기억은 불완전하지만, 기억하려는 마음만큼은 진짜라고 말이죠.

 

『블랙 미러』의 이 에피소드를 꼭 한 번 보시기를 권합니다. 영화의 소재와 연기, 그리고 구성 하나 하나 거의 완벽에 가까운 별 다섯 개짜리 이야기입니다. ★★★★★

 

촌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