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 엔돌핀 <수요레터>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말하려 하는 것

잇츠맨 2026. 4. 1. 15:38

 

안녕하세요, 촌장입니다.

 

  • 최근 《프로젝트 헤일메리》란 영화가 1,500만명이 넘은 《왕과 사는 남자》를 따돌리고 박스오피스 선두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라이언 고슬링이 주인공을 맡아서 흥행에 더 탄력을 받는 것 같기도 하구요. 워낙에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두었기 때문에 아주 오래 전부터 기대하고 있던 영화이기도 합니다. 
  •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마션》으로 유명한 앤디 위어의 세 번째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죠. 개인적으로는 《마션》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어서 앤디 위어의 최고의 작품라고 생각하는 아주 멋진 SF 소설입니다. 
  •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외계인과의 소통입니다. 소설  《마션》에서도 금성에 홀로 남은 주인공이 지구의 관제탑과 어떻게 소통을 해나가는 지에 대한 정말 흥미로운 장면들이 나옵니다 . 감동적이기까지 한 그런 소통의 장면이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는 한층 더 흥미로워 집니다. 이번엔 아예 종족이 다른 존재가 어떻게 소통을 나눌 수 있을까인데요.
  •  완전히 다른 존재인 두 생명체가 만나서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할 때 소통과 교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아주 흥미로운 화두입니다.
  • 그래서 이번 수요레터에서는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 나눠볼까 합니다.  

 

 

태양이 죽어가고 있다

  • 먼저 소설의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해 드리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 태양과 금성 사이에 이상한 선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페트로바선'이라고 명명된 이 선을 조사한 결과, 광선의 세기가 점차 강해지고 있는 반면 태양의 빛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죠. 태양 에너지의 10%만 줄어도 지구의 생명체는 멸망한다는 보고서가 나오게 되고 인류는 비상 상황에 들어갑니다. 
  • 금성에 탐사선을 보내서 '페트로바선'을 검사한 결과 '아스트로파지' 라고 불리는 미생물체들의 군집임을 알아냅니다. 이 미생물들이 태양의 에너지를 흡수해서 개체를 급격히 번식시키고 있음이 밝혀자고, 이 생명체는 주변 8광년 이내의 별들을 감염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됩니다. 
  • 그런데 유일하게 11.9 광년 떨어진 '타우세티' 만 밝기의 변화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지구의 과학자들은 아스트로파지의 번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겠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류는 아스트로파지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타우세티에 우주선을 보내는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그 프로젝트의 이름이 바로 프로젝트 헤일메리이죠. 
  • 프로젝트 헤일메리에 탑승하게 된 그레이스는 혼자 살아남아 미션을 수행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거대한 비행체를 만나게 되죠.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 알고보니 이 외계인들도 아스트로파지에 공격을 받아 자신들의 행성도 멸망의 위기에 처한 상태였죠. 이들도 생존을 위해 타우세티에 우주선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 같은 목적을 가진 지구인과 외계인이 우연히 만났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서로를 도와 자신들의 고향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 여기에 커뮤니케이션, 소통과 관련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제대로 펼쳐지게 됩니다. 

 

 

가장 다른 두 존재

  • 완전히 다른 존재인 지구인 그레이스와 외계인 록키 (그레이스가 록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의 조우는 지구에서 11.9 광년 떨어진 우주 한복판에서 이렇게 시작됩니다. 
  • 그레이스가 탄 우주선에 거대한 비행체가 다가오더니 연결을 시도합니다. 통로 같은게 연결되더니 정체불명의 존재가 그레이스의 우주선을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레이스는 너무 두려웠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니 그 두드림에 어떤 패턴이 있다는 걸 발견합니다.
  • 한 번, 두 번, 세 번. 이건 공격이 아니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걸 그레이스는 알아채게 되죠. 
  • 일단 외계인 록키가 얼마나 인간과 비슷한 점이 거의 없는 존재인지를 설명 드려야 할 것 같네요. 
  • 록키는 일단 눈이 없습니다. 시각이라는 감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죠.
  • 다리는 다섯 개이고, 바위처럼 단단한 외골격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딱딱한 표피를 가진 거대한 거미. 이렇게 상상하면 그리 틀리지 않을 겁니다. (영화에서도 예고편에 보니 록키의 이런 외모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 더군다나 섭씨 200도가 넘는 고온 고압 환경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인데요. 별도의 발성기관이 없이 몸 전체로 진동을 감지하고, 음계의 조합으로 의사를 표현합니다. 표정도 읽을 수 없고, 몸짓의 의미도 알 수 없습니다. 악수도, 고개 끄덕임도, 미소도 통하지 않습니다.
  • 언어는 커녕 감각의 체계 자체가 완전히 다른 두 존재 사이에서 어떻게 ’소통’이라는 게 가능할까요?
  •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 바로 인간과 외계인이 어떻게 소통을 만들어가는가에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언어를 만든다는 것

  • 둘이 처음 시작한 대화는 숫자를 주고받은 것이었습니다. 벽을 사이에 두고 한쪽이 세 번 두드리면 다른 쪽도 세 번 두드리는 식으로요.
  • 숫자가 통하자 그 다음은 물질이었습니다. 그레이스가 록키에게 물을 보여주고, 록키가 음계로 반응합니다. 그 음이 곧 ’물’이라는 단어임을 알죠. 
  • 록키는 음계로 말하는 종족이거든요. 음높이의 조합이 곧 그들의 단어이고 문장입니다. 그레이스는 이 사실을 알아내고, 하나하나 음과 의미를 대응시켜 나갑니다.
  • 숫자부터 시작해서 물질의 이름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물, 금속, 공기에 대한 음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동사로 넘어가죠. 예를 들어 가다, 보다, 만들다 같은.
  • 그리고 마침내 감정의 단어들을 찾아내려 노력합니다. 좋다, 두렵다, 걱정하다. 같은 느낌의 단어들. 
  • 이런 과정이 놀랍도록 느릴 수 밖에 없죠. 소설의 상당 부분이 이 느린 언어 구축에 할애됩니다. 하루에 단어 몇 개를 겨우 합의하고, 다음 날 다시 확인하고, 오해가 생기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 그런데 이 느린 과정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둘 사이에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 집니다. 그리고 그 언어로 록키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 외계인의 말투에 푹 빠질 수 밖에 없게 되는데요. 
  • 록키의 말투는 아주 독특합니다. 관사도 없고, 접속사도 거의 없고, 문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죠. 어린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때처럼 핵심만 남긴 문장들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 기쁠 때는 “좋다좋다좋다”를 연발하고 걱정이 되면 “너 괜찮아?”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무언가를 이해하면 “나 이해”라고 짧게 말합니다. 
  •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면 “의문의문의문!”을 반복합니다. 궁금하다는 거죠. 
  •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몇 개의 문장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엔 깊은 대화가 가능하게 됩니다. 왜냐면 너무 절박하기 때문이죠. 서로 너무 외롭기도 하구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전심을 다해 노력하기 때문에 이런 단순한 단어의 조합만으로도 진실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겁니다. 
  • 처음에는 이 서툰 말투가 웃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읽다 보면 이 투박한 문장들이 어떤 세련된 대사보다 더 정확하게 감정을 전달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군더더기가 없으니까요. 의도를 포장할 줄도 모르고, 에둘러 말할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록키의 말에는 거짓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같은 말을 쓰는데 왜 어긋나는가

  • 소설을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쓰는 세련된 언어에는 혹시 너무 많은 포장 지가 붙어 있는 건 아닐까. 록키처럼 “나 걱정”이라고 직접 말하는 게, 때로는 장문의 위로 메시지보다 더 진심에 가까운 건 아닐까 하고요. 소통이란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인내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 상대를 이해하겠다는 의지가 먼저이고, 도구와  방법은 그 의지 위에서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을 로키와 그레이스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됩니다. 
  • 우리가 쓰는 언어는 너무나 편리합니다. 그런데 그 편리함이 오히려 소통의 본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지점이 있지 않나 싶어요.
  • 카톡 한 줄에도 상대의 감정을 오독합니다. 회의실에서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서로 다른 입장으로 다투기도 하구요.
  • 수십 년을 함께 산 가족 사이에서도 “네가 그때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라고 묻을 때가 많습니다. 
  • 문법적으로는 완벽한 문장이 오가지만, 상대가 왜 그 말을 하는지에 대한 관심 없이 내 대답을 준비하는 데 바쁜 대화. 듣는 척하면서 판단하고, 공감하는 척하면서 반박을 구상하는 대화. 같은 언어라는 고속도로 위에서 우리는 종종 서로를 스쳐 지나갑니다.
  • 반면 그레이스와 록키 사이에는 고속도로가 없습니다. 비포장도로조차 없습니다. 길 자체를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둘의 소통은 더 정직합니다. 오해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 모든 단어가 합의를 거쳐야 하고 모든 문장이 확인을 필요로 합니다
  • “내가 이해한 것이 네가 말한 것이 맞는가?”
  • 이 질문이 그들 사이에서는 절대 생략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소통의 출발점이 아닐까 합니다. 

 

 

의미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

  • 소설에서 가장 가슴을 울리는 순간들은 대부분 이 불완전한 언어가 마침내 감정을 전달하는 데 성공하는 장면들입니다.
  • 록키가 그레이스에게 처음으로 걱정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레이스가 위험한 실험을 하려 하자 록키가 말합니다. “너 걱정. 나 너 걱정.” 관사도 없고 동사 활용도 없는, 겨우 단어 몇 개를 이어붙인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 한 마디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쌓아온 두 존재의 관계를 단번에 증명합니다. 처음에 숫자를 주고받던 낯선 존재가, 이제 상대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이가 된 거니까요.
  • 소설 후반에는 더 결정적인 장면이 옵니다. 스포라서 여기서 다 말하긴 그렇지만, 그레이스가 로키에게 이렇게 말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나 여기. 나 돕다 너.”

 

  • 이 장면에서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겁니다. 복잡한 수사도 없고 긴 독백도 없습니다. 음계 몇 개, 짧은 단어 몇 마디. 그것이기에 충분합니다. 군더더기가 벗겨진 언어는 오히려 감정의 밀도를 높이더군요.
  • 외계 종족의 언어가 음계라는 설정은 과학적 합리성을 위한 선택이었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소설의 주제와 아름답게 공명합니다.
  • 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소리는 닿습니다. 의미 이전에, 진동이 먼저 도착합니다.

 

 

소통은 같은 말이 아니라 같은 방향이다

  • 영화 개봉 이후 소설에 대한 관심이 다시 올라가고 있습니다.
  • 영화를 보고 소설을 집어든 사람도, 소설을 읽고 영화관을 찾은 사람도 아마 같은 장면에서 울컥할 겁니다. 록키가 전하는 짧은 음계 한 마디. 그리고 그것을 알아듣는 그레이스의 표정만으로도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질 겁니다. 
  • 그 순간, 우리는 직감합니다. 소통이란 결국 ’같은 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쪽’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 11.9광년의 거리, 200도의 온도 차이, 완전히 다른 감각 체계. 이 모든 장벽에도 불구하고 두 존재를 연결한 것은 상대를 이해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의지였습니다. 
  • 우리에게는 말이 있고 글자가 있습니다. 대화의 수단도 다양하죠. 록키와 그레이스보다 훨씬 풍요로운 소통의 도구를 갖고 있는 셈이지만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도구의 풍요가 아닐지 모릅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한 번만 멈춰서 물어봐도 좋겠습니다.

내가 이해한 게 네가 말하려는 것이 맞아?

 

가장 먼 우주에서 온 이 이야기가, 결국 가장 가까운 곳을 돌아보게 만들더군요.
이번 주말엔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러가봐야 겠습니다. 

 

 

촌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