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장입니다.
AI 가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1956년 다트머스 회의에서 존 매키시를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이 과연 기계를 인간의 지능처럼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통해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이후, 70년이 흐른 지금 이 질문이 현실화 되는 상황을 우리 모두 목격하고 있습니다. AI는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수많은 영역에서 AI는 이미 인간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분야가 번역입니다.
이미 실시간 번역기가 돌아가고 있고, 클릭 한번이면 원하는 언어로 자동 번역을 해줍니다. 더 이상 언어의 장벽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보이죠. 그래서 이런 얘기도 나옵니다. 앞으로 외국어를 굳이 배울 필요가 있을까? 굳이 번역서로 옮긴 책을 읽을 이유가 있을까? 그 번거러운 번역의 작업이 앞으로도 필요할까?
막연하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떼, 이 책을 만났습니다. 홍한별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란 책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전자책으로 우연히 읽다가 곧바로 책을 구매했습니다. 목디스크 때문에 고개를 숙여서 책을 읽기 힘들어진 이후, 대부분의 책은 전자책으로 읽고 있지만 그래도 반드시 책으로 책장을 넘기며 읽어야하는 그런 종류의 책이 있습니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같은 책입니다.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번역에 관한 책입니다.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홍한별 작가가 번역이라는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기 고백같은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작가의 작은 경험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미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은 ‘아그리파’ 석고상을 교탁 위에 올려 두고 그림을 그리라 얘기합니다. 눈부신 하얀 석고상을 스케치북에 검은 4B 연필로 어찌 그려야할 지 막막해 합니다. 서투르게 흉내내여 종이 위에 그리려하지만 흰 아그리파 석고상을 표현하려하면 할 수록 석고상 그림은 점점 더 어두워지기만 합니다. 애초에 흰색을 그린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저자는 생각합니다. 실상은 이토록 명징한데, 이 실상을 표현하는 일은 왜 그다지도 어려운 일일까 고민합니다.
작가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그 간단한 줄거리, 즉 자신의 한 쪽 다리를 빼앗아간 거대한 흰 고래를 찾아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를 무려 135개 챕터에 걸쳐 풀어 낸 책이 <모비 딕>입니다. 완역본은 700페이지가 넘습니다. 이 책은 선장의 고래 복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고래에 대한 이야기, 요컨대 고래를 언급한 수많은 문헌을 나열하고, 고래의 그림, 생물, 역사 등 고래에 대한 온갖 측면들을 설명하는 것이 책의 대부분을 이룹니다. 정작 모빅 딕은 135 챕터로 이루어진 이 책의 133챕터에 가서야 결국 등장합니다. 소설의 화자로 등장하는 이슈메일은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고 나서는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고래를 아무리 해부해보더라도 피상적인 것 이상은 알 수 없다. 고래에 대해서는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고래의 흰색’ 이라는 장에서 모비 딕의 흰색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흰색에 들어있는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면서 “흰색에는 좀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숨어 있다.” 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흰 고래 모비 딕은 설명해내기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흰색은 모든 색이 합해져야 나오는 색입니다. 아니 색이란 표현은 맞지 않고 빛이라 해야겠죠. 모든 빛이 합치면 흰 빛이 됩니다. 그러나 또 엄밀히 흰 색과 흰 빛은 다릅니다. 흰 색은 흰색이고, 또 모든 것도 될 수 있습니다. 번역의 과정이란 흰 고래를 설명하는 일이고, 도화지에 흰 아그리파 석고상을 그리는 행위라고 작가는 고백합니다. 흰 것을 묘사한다는 것은 이처럼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흰 고래 같은 텍스트를 만났을 것이다. 잡히지 않는 공허. 포착할 수 없는 의미. 이 쪽을 붙들면 저쪽을 놓치고, 저쪽을 잡으면 이쪽이 사라지는 단어를,… 붓질을 더할수록 더럽혀지기만 하는 순백을?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번역은 얼마나 투명해져야 하는가?”
단어 하나에 포함되어 있는 수많은 의미들이 하나의 단어로 번역되는 순간 흰색은 더 이상 흰색이 아니게 됩니다. 번역은 명료하게 정의내릴 수 없으며 그저 막연하게 <모비 딕>의 화자 이슈메일이 고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모비 딕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온 그 과정을 그나마 따라하는 행위일 것이라 말합니다.
AI는 대단합니다. 세상을 바꿔버리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 존재하던 모든 비효율성을 모조리 없애버릴 태세이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에 대한 기준을 바꿔버리고 있습니다. 번역도 그러한 일 중 하나일 테고, 아마도 AI가 번역이라는 행위의 거의 모든 것을 담당하게 될 날이 올 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효율성은 AI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흰 색을 표현해 내는 일은 결국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으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답이 없는 구분이 없는 명확하지 않는 그 무엇은, 효율과는 대척점에 있는 그 무엇이기도 할 테니까요.
이 책 또한 답이 없는 어떤 불가능한 독해의 시도일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이야기합니다.
“이슈메일이 그랬던 것처럼, 번역의 사례를 들고, 번역을 분석하고, 번역을 해부하고, 번역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이자,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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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뿐 아니라, 책의 디자인도 좋습니다. 암흑같은 검은 바탕에 흰 점들이 무너져 내리며 겨우 보일 듯 말듯 책 제목을 만들어 냅니다.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좋은 책입니다.
촌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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