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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구조주의란 무엇일까요?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지성이 스스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해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물음 아래 밑줄을 긋는 일'입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중에서

 

 

 


살아가면서, 철학의 중요성은 무엇일까요? 어려운 일입니다. 하루의 일상은 철학보다는 실용이 훨씬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중요합니다. 생각과 판단의 기저에 흐르는 기본적인 가치가 바로 철학일 테고, 부지불식간에 내 속에 숨어있는 철학의 지팡이에 의지해 하루를, 일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보면 틀린 얘기는 아니겠죠.

정말 오랜만에 철학책을 읽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가 쓴 구조주의 입문서인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입니다. 정말 제목 한번 더럽게 재미없게 지었네요. 이런 책 제목을 보고 책을 사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조주의의 개괄적인 내용과 간단한 역사를 이해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자, 이제 구조주의의 세계로 한번 떠나 볼까요?


먼저 구조주의란 무엇인가부터 얘기해 봐야 겠죠. 조금 긴 정의이지만, 이게 바로 구조주의란 겁니다. 

구조주의라는 것... 우리는 늘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제가 될 일도 없다." 27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니체를 거치면서 구조주의란 철학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사람들이군요. 암튼 구조주의의 기본적인 철학은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고, 주체로서의 자아란 생각만큼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입니다.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 생각은 내 주변의 환경과 문화, 유전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내 존재라는 것이 그냥 원래부터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동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실체라는 개념을 인식하는 것이 구조주의의 기초입니다. 

이제 비로서 구조주의의 창시자가 나타납니다. 소쉬르. 
김소월 님의 '꽃'이란 시 아시죠?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에라야 비로서 그것이 나의 꽃이 되었다는... 바로 이 개념입니다. 어떤 관념이 원래 거기에 있어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 주면서 그 관념이 비로소 우리의 사고 체계 속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 소쉬르는 밤하늘의 별자리를 예로 듭니다. 하늘의 별은 그냥 무작위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 그 자리에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냥 그렇게 막연하고 비정형적으로 떠 있는 하늘의 별을 어떤 의식을 가지고, 또는 임의의 언어 활동을 통해서 쪼개는 작업. 그렇게 '분절되어 있는 것들'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활동과 개념이 바로 구조주의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다보니, 좀 어려워 지는군요. 암튼 그런 겁니다. 

다음은 푸코입니다. 유명하신 분이죠. 푸코의 계보학적 사고가 구조주의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게 됩니다. 현재의 '지금, 여기, 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상의 그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당시의 상황과 사고로 이해를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 시점을 '사건의 영도'라고 표현하는 군요. 참 어려운 표현이긴 합니다만, 동시에 멋져 보이기도 하네요. 아무튼 푸코는 현재의 상황들을 현 시점에서 객관화하고 표준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권력과 욕망에 의해 구동 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식을 정리하고 축적하는 시도 자체가 바로 그런 의지의 발로라고 아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 보고 있어요. 결국은 현재를 비판하는 우리의 반역 역시, 현재의 제도 속에서 제한되어진 사고라고 생각한다고 하면, 이건 자기 비하를 넘어서 아무런 행동이나 비판도 다 바보 같은 일이 되어버리는 악순환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게 대체 뭡니까? 뭘 해도 넌 안돼 라고 말하는 아주 표독스런 철학자네요. 하지만, 이런 철저한 자기 비판과 반성 속에서 참다운 창의가 발현할 수 있다는 아주 긍정적인 결론을 내보려 합니다. 대머리 빡빡의 저 정나미 떨어지는 학자에게도 우리는 배울 점이 있다고 감히 말해 봅니다. 사실 매우 똑똑해 보이기는 합니다. 

이제 좀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롤랑 바르트입니다. 바르트는 기호학을 통해서 구조주의를 탄탄히 만든 학자입니다. 그렇다면 또 기호학이란 무엇인가를 집고 넘어가야 겠지요.

"기호학은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이 기호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이 어떤 메시지를 어떤 방식으로 발신하고 어떻게 해독되는지 등을 규명하는 학문입니다. 128"

바르트의 가치는 모든 문화 현상을 '기호'로써 읽고 분석하고 해석하려고 시도했던 점이라고 볼 수 있어요. 언어의 3가지 개념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야 하는데, 랑그(Langue)와 스틸(Style)의 두 종류의 규칙이 있습니다. 랑그는 그냥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공통적인 국어라고 보면 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다 쓰는 그런 언어의 속성이죠. 스틸은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개인에게 특성화된 언어 감각입니다. 바로 내가 사용하고 있는 나만의 스타일이라는 거죠. 알겠죠? 여기까지는 다 이해가 되는데, 여기에 바르트는 '에크리튀르'라는 독특한 특성을 하나 부여합니다. 뭐든 만들어 내는 데에는 천부적인 소질들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암튼 에크리튀르는 집단적으로 선택되고 실천되는 '선호'라고 합니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의 밈(meme)이란 정의와 일맥상통합니다. 밈은 문화적인 유전 요소라고 보면 되는데요, 바로 바르트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그런 사회적, 집단적 선호도가 이미 들어가 있다는 것이고, 그런 부분이 '에크리튀르'라는 속성입니다. 그래서 바르트가 진정으로 소망했던 세상은 '에크리튀르'가 제거된 순백의 언어로 이루어진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게 가능할까요?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과연 그런 언어의 세상이 어떤 가치를 가지게 되는 지도 의구심이 듭니다. 다만 바르트의 의도는 진실이라는 것이 정말 가능해 지려면, 숱한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배제된 순수한 것들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의 눈초리로 세상을 비판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우리를 정나미가 떨어지는 인간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가 봅니다. 

지루하신가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 책의 저자인 우치다 타츠루는 나름대로 정말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핵심적인 가치만을 선별해서 큰 그림에서 구조주의를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책이잖아요. 그것도 어감에서부터 벌써 딱딱해지는 '구조주의'의 입문서라니.. 재미있게 설명하기엔 태생적인 한계가 있는 책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리뷰를 쓰고 있는 저도 그런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요. 이해해 주세요. 

구조주의의 끝판왕, 레비스트로스를 소개할 시간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문화인류학자입니다. <야생의 사고>란 책을 통해서 실존주의의 지존, 장 폴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실랄하게 비판하면서 실존주의 철학에 사망 선고를 내리신 바로 그 분입니다. 실존주의란 건 또 뭔가요? 사르트르 선생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이 있죠.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어떤 결단에 따른 구체적인 어떤 행동에 따라서 기본적으로 그 인간의 '본질'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구조주의 철학자들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논쟁은 '주체' 또는 '역사'와 관련된 부분에서 입니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engagement)에 대해서 조금만 더 얘기해 볼께요. 

"사르트르의 '참여하는 주체'는 주어진 상황에 과감하게 몸을 던지고 주관적인 판단을 토대로 자기가 내린 판단의 책임을 숙연하게 받아 들이며, 그 수용을 통해서 '그러한 결단을 내리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 자기의 본질을 구축해 가는 것입니다." 156

아주 맘에 드는 말입니다. 주체의 책임과 숙명에 대해서 아주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사르트르는 그러한 숙명적 앙가주망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올바른 실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최대한 문명화된 사회, 진화된 문명의 배경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뭘 좀 잘 알아야 그래도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거죠. 상식 선에선 아주 명확한 의견입니다. 오늘 날 세상은 이런 실존주의적인 사고 하에서 유용하게 돌아가게 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사르트르의 '역사' 개념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미개인의 사고 방식과 세계관, 및 가치관을 연구하면서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미개인의 사고'와 '문명인의 사고'의 차이는 발전 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애초부터 '다른 사고'이며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 160

미개인과 문명인의 차이는 그 사회의 특정 집단이 가지고 있는 관심의 차이에서 나타날 뿐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지적 능력이 차이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역사의 진보라는 측면은 무의미하며, 고유한 문화적 상황 속에서 발전되어 나갈 뿐이라는 겁니다. 이 책에서 말하길, 사르트르가 나름대로 레비스트로스의 의견을 반박하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지만, 결국 논리의 싸움에서 박살이 났다고 합니다. 레비스트로스 승리. 그래서 이른바 실존주의의 시대가 저물고 비로소 구조주의의 시대가 만개되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문화적 포용력은 바로 이러한 구조주의적인 가치관에 힘입은 바 크다고 봅니다.
인간의 본성이 증여에 있다는 또 다른 의견은 그냥 넘어가렵니다. 평화적으로 여자를 획득하기 위해서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문화적 유전자가 만들어졌다는 의견은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동의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성분들은 기겁을 할 발상입니다. 

자, 이제 구조주의의 마지막 인물을 소개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라캉입니다. 이 분의 전문 분야는 정신분석입니다. 구조주의는 참 다양한 면모를 지닌 철학 사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언어학자, 인류학자, 역사학자, 그리고 정신 분석학자에 이르는 이런 장대한 분야의 아우름은 구조주의의 놀라운 변용과 사상적 확산이라고 보여집니다. 아무튼 라캉은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단적인 의견을 제시했는데, 정신 분석에서 '자아'가 치료의 거점이 될 수 없다는 '거울단계' 이론을 내놓습니다. 처음 거울을 보았을 때, 투영되는 자신의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닙니다. 그저 나 일 거라고 생각하는 이미지일 뿐입니다. 그런데, 거울 말고는 도저히 나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지의 나일 뿐이지만, 어쨌든 나는 거울에 비친 나를 나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고, 결국 내 자아의 기원은 진정한 내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암울한 분석적 결과를 내놓습니다. 아... 내가 알고 있던 내가, 결국은 내가 아니라니.. 이런 허망한 결론이 다 있나요?  아무튼 정신 상담에 있어서, 대상의 자아를 찾아내고자 하는 시도는 다 헛방일 뿐이라고 하는 거고,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 즉, 상담가와의 개별적 교류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작업을 통해서 문제의 해결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화의 목적은 자아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아의 있는 곳을 찾고 그 작용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신분석의 일입니다." 203

라캉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이론은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을 '오이디푸스'라고 부른다고 판단한 라캉은, 자라나는 과정, 언어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원초적으로 분절된 세계 속에서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숙명의 인식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혹부리 영감의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혹부리 영감의 이야기 아시죠? 혹 떼러 갔다고 오히려 혹을 붙이고 돌아온 불행한 노인의 이야기죠. 못된 마음을 먹으면 이렇게 도리어 손해를 본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로만 알았지만, 진짜 이 동화의 의미는 구조주의적인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자 하는데 있습니다. 바로 혹부리 영감이 당한 부조리한 상황이 실은 흔히 겪을 수 있는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된다는 무언의 압력이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내 분화와 혼란의 원흉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끝끝내 인생을 쫓아오는 무시무시한 의미이며, 그렇지만 이런 압박을 견디어 내고 받아들일 때, 진정한 하나의 자아, 정상적인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제 아버지는 정말 좋으신 분이시거든요. 자상하고, 헌신적이고, 노력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저희 자식들에게 보여주신 분입니다. 저는 단 한번도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전투적인 상황에 내몰린 적이 없었고, 아버지를 인생의 적으로 간주한 적도 없습니다.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사회화 과정이 '오이디푸스'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보는 라캉의 의견은 개인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부조리한 현실, 그 무지무지한 현실 속에 하나의 개인이 당할 수 밖에 없는 무력감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해보자는 측면에서는 라캉의 말은 도움이 됩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원래 이 사회가 그렇다는 것.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말고, 좀 화해하면서 잘 지내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결론이 가능합니다. 어렵게 돌아서 왔지만, 그런 얘기가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긴 글을 통해서 우치다 타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라는 책을 살펴 보았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 솔직히 별로 기대 안합니다. 제가 봐도 내 생활에 그다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현실적인 조언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하고, 뭣 하러 저런 고민을 할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이 책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사고와 언어의 유희 과정은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유용한 방법이기도 하거니와, 큰 철학의 흐름을 읽어내어서 문화와 사고의 기본적인 저의를 발견해 나간다는 건, 지적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는 아주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니까요.

다시 원론적인 물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왜 철학이 필요할까요? 왜 이런 사고의 유희가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답은 이겁니다. 인간이기에 우리는 사고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지성을 가지는 것은 마음 속에 질문을 가지는 것이다. 그 질문은 아주 본원적인 것이어야 한다. 나는 누구이고, 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이 사회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은 어떠해야 하는가? 공허한 듯 하지만, 부지불식 간에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상적 가치 체계입니다. 내가 서 있는 이 곳을 제대로 파악하고, 자기 답게 살아내기 위해서는 소위 '철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구조주의 사상은 벌써 저무는 체계입니다. 이른바 포스트 구조주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 포스트 구조주의는 무엇인가? 난 모르겠습니다. 구조주의도 이해하기 힘든데, 포스트 구조주의라니요. 오늘은 이제 그만하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좀 남아 이렇게 길게 썼으니, 부디 넓은 아량과 구조주의적인 마음 가짐으로 이해해 주시길...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저자
우치다 타치루 지음
출판사
갈라파고스 | 2010-10-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구조주의의 대표적 인물과 핵심 사상을 한자리에서 만난다!'구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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